민주주의에 대한 해석과 정의는 무척이나 많지만, 가장 기본은 ‘그 성원이 주권을 행사하는 이념과 체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합의를 거쳐 규칙을 정한다. 이를 제도라고 한다. 즉, 민주주의 제도는 그 성원이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많은 제도들이 있겠지만 거칠게 직접민주제와 대의민주제로 분류할 수 있다. 모든 사안에 대해서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성원들이 직접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직접민주제라면, 투표를 통해 대의자를 선출하여 그 대의자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이 대의민주제다. 직접민주제는 전문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과 사회적 비용이 크다는 점이 문제고, 대의민주제는 총의의 반영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과 주권자의 정치적 무관심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기본적으로 현대사회는 정보기술의 발달에 의해 온라인 투표라든지 빠른 의견교환-소통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이에 의해 직접민주제적인 요소를 구현하기 용이해진 사회다. 하지만, 개인이 모든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어려울 정도의 복잡도를 가지고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대의제에 대한 부정보다는 직접민주제의 특성을 반영한 풀뿌리 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같은 절충형 이론들이 21세기 초에 언급된바 있다. 이러한 절충은 주로 대의민주제의 기본요소인 대의자의 역할과 전문성에 대한 존중과 함께 주권자의 역할을 키워 이를 보완하는 형태의 방안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최근 노동당 내부정세가 흥미롭기 때문이다. 노동당은 당직선거를 통해 대표단(당대표1인, 부대표4인)과 전국위원회(당권자 150인당 1명), 당대회(당권자 30인당 1명)을 선출하고 이를 통한 대의민주제를 구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대표단은 당의 사업과 정책을 집행하는 집행기구이고, 전국위원회는 일상적으로 열리는 의결기구, 당대회는 최고의 의결기구다. 국가로 치자면, 당대표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고 전국위원회와 당대회는 국회라고 보면 되겠다.
흥미로운 점은 대표단과 전국위원회/당대회의 구성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대표단은 ‘진보결집전국당원모임’이란 의견그룹이 과반을 점유하고 있고, 전국위원회와 당대회는 어느 한 그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좌파 당원회의’와 ‘당의 미래’가 ‘진보결집전국당원모임’과 진보결집에 대한 논의를 두고 선을 긋고 있는 상황이다. 즉, “여소야대”의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지난 6월 4일 발표된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4자 공동선언’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적 합의를 통해 잘 풀어 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의 진로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인지라 흔히 말하는 ‘통합파’와 ‘사수파’의 평행선 달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진보결집전국당원모임’은 당직선거때부터 당원들의 의사를 당원총투표를 통해 묻고, 이에 기반하여 최고의 의결기구인 당대회를 통해 당의 진로를 결정짓자는 주장을 하고 있고, ‘당의 미래’는 꽤나 높은 가결요건(재적과반, 전체 유권자의 50%이상의 찬성)을 가진 당원총투표를 통해 직접 결정짓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신좌파 당원회의’는 결집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반대하는 ‘신좌파 당원회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두 그룹은 전혀 다른 당원총투표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동당의 당헌에 보면, 당원총투표를 ‘당대회는 당원총투표를 부의할 수 있다.’라고 딱 한줄로 정의하고 있다. 당헌이 미비한 것일 수도 있고, 집행기구와 의결기구에서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현재의 규칙으로는 당대회에서 당원총투표를 부의할 수 있다. 이 규정을 두고 한 그룹은 이를 잘 활용해서 의결기구가 당원들의 대의를 잘 반영할 수 있도록 하자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한 그룹은 규정이 미비하니 규정을 잘 고쳐서 최고의 의결권으로 만들고 이의 판단을 따르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경기를 앞두고 규정을 고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현재의 규정을 가지고 좋은 경기를 만드는 것이 옳을까? 기존의 당헌에 따르면, 당 대의원들은 당의 진로에 대한 권한을 당직선거를 통해 당원들에게서 위임받았다. 그런데 이 권한을 당 대의원들에 의한 당헌개정을 통해 당원총투표로 이관하자는 것은 권한을 위임한 당원들과 위임받은 대의원사이에 맺힌 합의를 깨는 행위다. 당헌에 대한 개정권한이 당대회에 있다 하더라도, 당원들과 대의원사이에 맺힌 합의를 깨는 것은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이 아니라고 본다.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계약을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수정하는 꼴이지 않은가? 만약, 수정하고자 한다면 당헌 개정권한을 통해 당헌을 개정하고 당대회를 해산한 이후 다시 변경된 계약내용을 기반으로 재구성하는게 옳지 않을까?
한편으로 당원총투표가 단순히 당원들의 총의를 묻는 여론조사라면, 굳이 당대회에서 의결하지 말고 집행부차원에서 여론조사를 하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당대회에서 결의한 당원총투표의 의미란 이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당원들의 대의를 확인할 필요가 있음을 그리고 그 대의를 의사결정에 반영할 것임을 당대회의 대의원들의 결의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표단이 관장하는 집행부에서 시행하는 여론조사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당원총투표에 대한 왈가왈부가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당원들의 대의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대의자들의 인식과 그에 따른 불안일 것이다. 대의제의 특성상 대의자의 개인적인 의지가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원들의 의지를 공개적으로 확인하고 이를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의사결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이 압박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대의자가 지닌 권한이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이는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1. 무엇보다, 당원협의회 레벨에서는 단선으로 이루어지는 선거가 대다수인 지금의 당직선거가 얼마나 당원들의 대의를 잘 반영할 수 있는지는 무척이나 의문이다.
+2. 자꾸 민주주의의 원칙을 이야기하며 당헌을 개정하자고 지긋지긋하게 이야기해서 투닥투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