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일할 것인가?

물론 이 글은 살면서 쌓인 지극히 편협한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얼마전, 아는 분의 부탁으로 한 대학에 특강을 나갈 일이 있었는데, 이때 가장 난감했던 질문이 ‘어디에서 일하는게 좋을까요?’였다. 아마 건설 업계나 자동차 업계였다면, ‘그냥 대기업가면 다 똑같아요.’ 라고 쉽게 답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IT업계고, 이 바닥은 IT업계로 퉁친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분야별로 다른 산업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다양성이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한 답변은 -자뻑일지 몰라도- ‘패키지 업체에서 일하세요.’ 였다. 왜 이런 대답을 했을까?

사실, IT업계에서 일한다는 것, 조금 더 좁혀서 IT업체의 R&D부서에서 일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어떤 직장상사를 만나느냐의 문제다. 직장상사의 성향에 따라 야근의 비율이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다만, 그 업체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확률은 좀 달라질 수 있다.

IT업계라고 부르는 “바닥”은 업무 성격으로 보면, 패키지 업체, SI업체, 포탈업체, 게임업체로 볼 수 있다. 패키지 업체는 쉽게 말해 건물 다 지어놓고 분양받는 후분양을 주무기로 삼는 건설업체고, SI업체는 주문받아 건물짓는 업체다. 포털업체는 자기 돈으로 건물지어서 임대료 받는 업체다. 게임업계는 포털과 비슷하지만, 건물 대신에 리조트라고 생각하면 크게 다르지 않을듯 하다.

순서대로 패키지 업체부터 짚어보면, 패키지는 상대적으로 다른 분야에 비해 편하다. 한 회사에서 다루는 제품이라고 해봐야 많아야 5~6개 수준이고, 성향상 비슷비슷한 제품을 다룰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용하는 기술이 그렇게 다양하지도 않다. 제품이 성숙기에 다다르면, 고객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것 보다, 자체 개발을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요구사항의 변동도 그렇게 크지 않은 편이다. 다만, 유사한 제품을 만드는 다른 회사와 경합이 붙는 경우가 많으며, 이때 업무 스트레스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만 제외하면, 업무량의 변화가 크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컨트롤만 잘한다면 야근없는 한해를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패키지 업체의 특성상 개인이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냥 개발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자신이 담당한 소프트웨어를 계속 가져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개발자가 갖는 자기만족은 높은 편이다.

SI업체를 보자면, 아마 가장 빡센 분야가 아닌가 싶다. 인력파견업체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주로 고객사에서 원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주로 제품화하기 힘든 시스템을 다루거나, 제품화 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인력을 요구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다. 매번 프로젝트때마다 요구사항 분석부터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며, 비용을 아끼기 위해 금액을 깎고 기간을 단축하는 경우가 많다. IT업계에서 자살하는 개발자들이 사회적인 이슈가 된 적이 있었는데, 전부 이쪽 바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빡세다. 야근은 필수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쌓이는 인맥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고, 이 인맥이 나중에 꽤나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런게 장점이라면 장점이겠지만, 이 단계까지 가는게 너무 가시밭길이랄까…

게임업체는 빡세기로 치면 SI와 맞먹을 것이다. 100% 자체개발일 수 밖에 없음에도 패키지업체와는 달리 빡센 이유는 게임자체의 순환주기가 빠른 편이라서, 패키지보다 업데이트 주기가 빠르다는데 있다.업데이트는 요구사항의 변동을 의미하고, 업무량을 의미한다. 업무량의 변화는 크지 않지만, 그냥 업무가 계속 많다고 보면 된다. 요즘은 많이 좋아져서 덜 빡세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IT바닥에서 가장 빡센 부분중 하나라는건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가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돈을 많이 준다. 연봉킹.

포탈업체는 어찌보면 업계의 대기업이라고 볼 수 있다. 유행을 심하게 타는 것도 아니고, 연봉도 무난한 편이다. 100% 자체개발에 게임처럼 업데이트가 잦지도 않다. 포털로 한번 들어가면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근무조건도 좋은 편이다. 돈도 게임업체 만큼은 아니지만 꽤 준다. 단점이 있다면, 모 포털의 사례에서 보듯이 잘못 들어가면 줄줄이 목이 날아가는 경우가 생긴다. 게임과는 다르게 기술적 난이도가 그렇게까지 높은 편은 아니라서, 사측에서도 사업을 접을때 그냥 부서를 통으로 날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본은 블랙홀인데 어느 순간 화이트홀이 된달까. 사실 간지는 난다. 그게 외국계 포털이라면 더더욱. 아, 최대의 단점. 업계중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

이런 업체의 성향은 보스의 성격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확률의 문제긴 하지만, 야근 안시키는 보스를 만날 확률은 역시 패키지 아니면 포털이 높다. 하지만, 알아둘 점이 하나 있는데, 야근 안시키는 보스는 결과물에 더 민감하기 마련이다. 결국, 야근안한다고 널널하다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야근 안하는 만큼 근무시간에 더 빡세다는 이야기란 말씀.

사실 어느 쪽을 가든 열심히 하면 장땡이란 부류의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한국 IT의 기본 노동강도가 높은 편이고, 이에 기반해서 생각해보면, SI나 게임에서는 업무에 치여서 자신의 삶을 갖기 힘든 경우가 너무 많다. SI의 장점인 인맥에 기반한 미래나, 게임에 대한 재능이나 희망이 아니라면, 가급적 이 두 업체는 피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ps. 고백하자면, 자신이 엄청나게 개발을 잘해서 버그가 별로 안난다면, SI를 제하면, 어느 쪽에 가든 진짜로 크게 상관 없다. 일이 빡세지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버그문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