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저리 유유자적하며 웹서핑을 하던 중간에, 최근 내신과 특목고에 관련된 포스팅이나 기사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리고 뉴스를 보며 이야기하던 내용을 나름 정리해본다.
0. 나의 위치
이 글을 싸지르고 있는 나는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4학년 휴학중이며(2000년 입학이다), 올 가을 복학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대전에서 새벽 1시까지 자율학습을 시키는 고등학교를 97년 3월에 입학해서 2000년 2월에 나왔으며, 사교육은 초등학교때 학원, 중학교때 학원 잠깐, 고등학교 1학년때 종합반 3개월, 언어영역 단과 2개월, 수학2 정석 단과 3개월 다닌게 전부다. (고등학교때 학원을 거의 못다니다시피 한 이유는 학교측의 자율학습 정책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력 40개월의 프로그래머이기도 하고, 한 밴드의 베이시스트이기도 하다.
1. 특목고는 무엇을 위한 학교인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특수목적고등학교(이하 특목고)는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90조에 따라 ‘특수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다. 즉, 과학고등학교(이하 과고)는 과학을, 외국어고등학교(이하 외고)는 외국어를, 예술고등학교(이하 예술고)는 예술을, 체육고등학교(이하 체고)는 체육을 다루는 전문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라는 거다. 즉, 과학고는 이공계 인재를, 외고는 어학에 특화된 인력을, 예고는 예술가, 체고는 운동선수를 조기육성하기 위한 학교라고 볼 수 있다.
과연, 현재 특목고에 가는 학생들이 저런 목표로 학교에 가느냐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과고는 의대에, 외고는 유학이나 법대/경영대에 가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일류대학에 가기 위해 특목고에 간다는 거다. 예고나 외고는 현재 사회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이 역시 여러가지 면에서 재고할 면이 많다.
특목고의 본질은 엘리트주의에 기반한 인재의 조기육성이지 일류대학에 가기위한 사전교육기관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다들 아시다시피, 이유는 간단하다. 인기 좋은 학교/학과에 쉽게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기가 좋은 학교/학과가 특정 학교/학과로 편중되면서, ‘특수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이란 기본 전제가 무너져내렸고, 내신평준화로 인해 그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특목고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
특목고의 본질을 되찾는다는 것은, 특목고라는 특수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면, 그 혜택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대학진학을 강제/유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과할 수 있는 예를 들면, 과학고등학교를 나와서 의대에 가는 경우에 페널티를 주는 것은 어떨까? 그럼 최소한 의대에 가기 위해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경우는 파격적으로 줄지 않을까한다. 진로결정이 너무 빠른 것 아니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2. 내신강화의 허상과 사교육의 진실
내신은 각 고등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학력평가에 의해 도출된 성적이다. 중간, 기말고사로 대표되는 1년에 4번 행해지는 평가를 기준으로 2개학기의 성적을 나누어서 낸다. 고등학교 3년동안 행해지는 시험은 12번, 성적 합계는 6번이다. 이 사실은 무엇인가? 3년간 얼마나 ‘지속적’으로 공부를 해왔는지, 얼마나 제도교육에 충실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대학가는데 사교육은 필요없다’ 라는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이 ‘내신의 중요성 강화’이다. 결국 현재 시행되고 있는 내신이란 ‘사교육을 때려잡자!’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좀 어이없는 정책이자 사교육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이야기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거나 주변의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사교육의 대표주자인 ‘과외’가 갖는 본질은 다음과 같다.
‘학생이 놀 시간에 공부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다. 공부할 의지가 없는 학생에게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감시자를 붙여 공부를 하게 만드는 것이 과외의 본질이다. “과외해서 성적이 올랐어요!”라는 이야기는 “과외해서 놀 시간에 공부했어요”라는 이야기와 같다. 이건 상위권이든 중위권이든 하위권이든 동일하다. 과외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학생은 바로 ‘감시자를 붙여도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이다.
학원도 마찬가지다. 학습을 하지않고 놀 시간에 공부를 하게 하는 것이 학원의 본질이다. ‘쏙쏙 잘들어오는 명강의에요’라는 이야기는 설명을 잘해서 이해갔다는 것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딴짓 못하게 재미있는 수업을 이끌어 갔다는 이야기다. 결국은 놀 시간에 공부했다는 거다.
놀 시간에 공부하면 성적이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여기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수능에 변별력이 없다. 수능이 워낙 쉽다보니 다들 시간투자만 하면 성적이 오르는 시스템인 거다. 공부한 시간이 늘면 성적은 오르고, 공부할 시간은 노는 시간을 줄임으로서 나온다. 그리고, 그 시간의 변환은 사교육이 수행한다.
필자가 가진 개인적인 경험은 좀 다르긴 하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추억 중 대부분은 자율학습이다. (선생님들의) 폭력이 난무하는 조용한 자습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놀 시간’을 줄여줬다는 면에선 참 고맙기도 하다. (실은 노트에 코딩하며 놀았던 전력이 있긴 하다. 절대 안걸린다. 열심히 공부하는 줄안다..) 새벽 1시까지 자습을 시키면, 해가 떠있는 동안 무협지니 만화책이니 판타지소설등등의 놀거리는 다 놀고 할게 없어서 공부하게 된다. 떙땡이는 치다 걸리면 엄청난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그럴만한 배짱이 있는 친구들은 아마 어디가서 뭘하든 잘할거다. 굳이 대학에 안가도. 실제로, 필자와 친구들은 단체로 땡땡이를 한번 쳤던 경력이 있는데, 선생님들의 침묵의 폭력에 의해 조용히 반성하고 원래자리로 돌아갔다. 뭐 각목으로 좀 맞긴 했지만, 가벼운 수준이었다. (왠지 우울하다..)
아. 잠시 고등학교 시절을 추억하다보니 사족이 많이 들어간점은 양해해주시길 바라며 본론으로 돌아가면, 놀 시간을 빼앗아 공부할 시간으로 바꿔주는 사교육의 기능을 무시한채 학교교육의 중요도를 높여서 해결하겠다는 정책은 웃기는 이야기다. 결국은 시간 점유율의 문제다. 이를 무시하고서는 어떠한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사교육을 때려잡는 -본인이 생각하기에-가장 좋은 방법은 놀 시간을 줄이고 공부할 시간을 늘려서 나오는 성적향상의 폭을 대폭 줄이면 된다. 그리고 상위권의 변별력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 낫다. 수능이 어려웠던 97년도 같은 경우엔 300점이 넘으면 일류대에 간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최고득점자는 380정도에서 출발했다. 무려 80점이라는 변별코스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별코스 내에서 재능이 없이는 정말 성적을 올리기가 엄청나게 힘들었다. 거의 도닦는거다. ‘몰라서 못푸는 것’과 ‘능력이 없어서 못푸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실제로 이 영역은 사이버포뮬러에 나오는 제로의 영역은 아니어도, C++ 템플릿 디버깅급은 된다. – 예제가 엄청나게 특수한데다 대부분 감이 안오시겠지만…)
이와 함께, 제도교육 내에서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내가 교육학 전공인것도 아니고 자세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교과서에선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최소한 그 딱딱한 교과서는 공부할 의지를 빼앗아간다. (그래서인진 모르겠지만 편집이 이뻤던 D모사의 참고서가 참 마음에 들었다. 자고로 책은 이뻐야 한다.)
결론짓자면, 사교육을 없애고 싶으면 내신강화를 외치지 말고, 사교육의 기능을 대신할 방안을 생각해보라. 자율학습 강화나 방과후 수업 추가같은 쉬운거 말고 깔쌈하고 멋진걸로 말이다. 그런거 하라고 교육부에 월급주는거 아닌가?
3. 인문계 고등학교/대학의 숫자.
대한민국은 인문계 고등학교가 너무 많다. 이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대학을 가야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강요한다. 사회에서 필요한 인력이 되려면 꼭 대학을 나와야 하나? 대학도 많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에 진학을 위한 것이 아닌 진정 삶을 위해 배우는 과목이 몇개나 될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사실, 필자의 경우 고등학교때 배웠던 지식 중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쓰는 건, 기초적인 통계에 대한 지식, 간단한 기하학, 국어, 가벼운 철학지식(비록 철학사에 가깝고 수박 겉핥기라도.) 지리, 기술/공업, 가벼운 물리/화학 정도다. 이걸 3년간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오버다. 고등학교를 훨씬 다변화하고, 실제로 사회에서 필요한 인력을 조금 더 빨리 생산하는 것이 더 이득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전산학을 생각해보면, (전공은 아니지만 업이다.) 고등학교때 지식중 필요한건, 통계(물론 이를 위해선 미적분학이 필요하다)정도다. 파격적으로 생각해보면 5년제나 6년제 특수대학을 가정한 상태에서는 일찍 입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 싶다. 어차피 이 업계의 인맥이란 일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대학을 통해 형성되는게 더 크다. 물론, 이건 특수한 케이스이므로 다른 케이스에 일반화 시킬수는 없다.
대학입시의 문제점중 하나는 대학이 사회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걸 줄이고, 대학에 나오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아야할 안목이란 생각이 든다.
4. 끝으로.
사실, 글이 길긴 하지만, 내용자체도 좀 엉성하고 너무 성급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내신평준화 논란과 특목고 문제, 입시지옥의 문제는 경제적 계층화의 심화, 정부의 정책미스, 사교육에 대한 오해, 사회적 풍토등 다양한 이슈, 관점, 문제들이 복잡다양하게 얽혀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당사자는 정부인데, 정부가 너무 근시안적으로 그리고 너무 단순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면모가 보인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란 말이 있듯이 부디 차분하게 고민 좀 (더) 많이 하고, 연구 좀 (엄청나게) 확실하게 해서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쓰기에 가장 편한 언어인 한국어를 쓸 수 있는 나라에서 맘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자식교육 걱정 안하고. 후…
+ 이거 쓰다보니 새벽 4시다. 내일 계절 들으러 학교가는 날인데 어떻게 가지.. 후…
잘 읽었습니다. 원래 정부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근시안적이죠. 면피 근성 때문에…정부가 해결해 줘야 하는 문젠데 믿음이 안가서…
면피근성은 5년 단임제에서 나오는게 아닌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어떻게든 넘어가보자라는…
언제쯤 중장기적인 안목의 정부를 볼 수 있는걸까요.. 후..